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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중국정치사상사 3

중국정치사상사 3
  • 저자류쩌화
  • 출판사글항아리
  • 출판년2019-05-23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2-03)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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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당 황제들의 성숙하고 완비된 군도론



    제3권은 수당 시대부터 다룬다. 강성했던 수隋와 화려했던 당唐은 중국 봉건사회의 전성시대였다. 진시황이 황제 제도를 확립한 이래 봉건 전제주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는 800여 년에 걸친 장구한 비바람의 역정과 곡절의 변천을 겪으면서 제도적, 이론적으로 날로 성숙하며 완비되었다.

    581년 수 왕조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양梁나라를 멸하고 진陳나라를 평정하여 589년에 통일천하를 실현했으며 위진魏晉 이래 근 400년을 지속해온 분열 국면을 끝장냈다. 머지않아 천하 대란이 일어나 강력한 수나라가 멸망하고 이李씨 당나라로 대체되었다. 당 초의 여러 황제가 정치에 온힘을 기울임으로써 사회, 경제, 문화는 다시없을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당 중엽 이후 사회 모순이 날로 격화되었고, 755년 안사安史의 난을 전환점으로 당 왕조는 극성기를 지나 쇠락했으며 번진藩鎭의 할거로 차츰 오대십국의 분열 국면에 접어들었다.

    수당과 양송兩宋은 고대 정치사상 발전의 중요한 단계다. 선진 사상의 특징을 발단, 분화, 쟁명爭鳴이라 하고, 양한과 위진 남북조 사상계의 주요 경관을 일존一尊, 다원, 융합의 상호 작동이라고 한다면, 수당과 양송 사상 발전의 전체 추세는 종합, 심화, 겸용兼容이었다고 하겠다. 수당 시기에도 다원과 쟁명은 여전히 사상 문화의 영역에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치사상의 각도에서 본다면 수많은 중대한 이론 문제가 결론을 얻고 심화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이론 형태가 모두 심각한 변화를 통해 수많은 사상문화적 성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는 바다. 수당 여러 황제의 군도론君道論은 바로 이와 같은 사상 문화 발전의 큰 추세 가운데 첫 번째로 중대한 성과다.



    수당 시기 불교와 도교의 정치사상



    유, 도, 불 3교는 중국 전통문화의 3대 지주다. 수당 이래 3교의 교차와 통섭이 고대 문화의 전체를 구성했다. 유, 도, 불 3교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다투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부딪힌 것은 수당 사상사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3교의 충돌은 위진魏晉 시대에 시작되어 남북조 시대에 성행하다가 당나라 때 3교가 병립하는 국면을 연출했다. 봉건 왕조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3교는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여 셋으로 나뉘어 정립의 형세를 띰으로써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서로 배척하고 침투하는 과정에서 3교의 학설이 모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며 각자의 이론 형태에 심각한 변화가 생긴 것도 수당 사상사의 특징 중 하나다. 불교와 도교가 수당의 문화생활, 사회생활 및 정치 생활에 끼친 영향은 그 정도가 절대로 유가에 못 미치지 않았다. 사상 문화상 3교가 하나로 귀결됨으로써 전통문화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수당 유학의 부흥과 정치 철학의 새로운 변화



    수당 시기 유학의 이론 형태에 중대한 조정과 개조가 일어났다. 일찍이 양한 시기에 통치 지위를 차지했던 유학은 위진 이래 현학, 불교, 도교 등 몇 가지 강대한 사상 체계의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쇠락하는 형세를 보였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정치적 통일로 경제는 번영하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유학 진흥의 계기와 조건이 만들어졌다. 수당 교체기에 유학은 중대한 일부 이론 문제를 돌파했다. 당나라 중기 이후 유학은 3교 항쟁을 거치면서 차츰 피동적 위치에서 주동적 위치로 바뀌었으며 일련의 이론적 성과도 얻었다. 유학은 끊임없는 자아 조정과 개조를 통해 쇠미한 상태에서 부흥을 향해 치달았다.

    수당 시기 최고 통치자들의 대대적인 지지야말로 유학이 부흥하게 된 정치적 전제였다. 3교 가운데 유학은 줄곧 남다른 정치적 우세를 누렸다. 특정한 시기 혹은 제왕은 유학을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을 수도, 돌아볼 여가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학의 정치적 지위는 부정된 적이 없었고, 불교나 도교처럼 시시로 압제와 타격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정치사상: 군주 정치에 대한 반성과 균평均平 이상의 동경



    당나라 말년 정치는 부패하고 사회 모순이 전면적으로 격화되었다. 제왕은 하나같이 황당했으며 국고는 고갈되었다. 통치 계급 내부의 분쟁도 그치지 않았다. 번진藩鎭에선 영웅들이 할거하며 서로를 공격했고, 환관이 발호하여 제멋대로 생살을 주도했다. 남아南衙1의 조신들과 북사北司 환관 사이의 다툼이 물과 불처럼 위세가 등등했으며 조신들 사이 붕당 간 다툼 또한 분분히 발생했다. 국방은 텅 비어 이민족들이 침입함으로써 전쟁도 빈번히 일어났다. 토지 겸병 또한 엄중하여 “부자들은 전답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나 빈자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세금은 가혹하여 민중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정치가 어두울수록 사회적 폐단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여러 계급과 계층의 인물들이 성찰과 비판의 태도를 견지한 채 사회와 정치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일련의 사조를 형성했다. 성찰과 비판은 사회적 폐단을 없애줄 구세의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과 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북송 시기 정치 개혁, 왕권 강화의 정치사상



    송나라는 위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이어받아 아래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문을 열었다. 역사 발전 과정으로 볼 때 중국 봉건사회는 이로부터 가장 융성한 시대에서 차츰 말기로 진입했다. 송대에 중앙 집권은 한층 더 강화되었고 소작 제도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상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자연과학 및 각종 학술 사상 또한 장족의 발전을 했다. 송 왕조는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왕조였으며 수많은 골치 아픈 정치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정치 개혁과 왕권 강화는 북송 정치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 현상이었다. 태조와 태종은 구 정치 체제를 개혁했으며 인종仁宗은 ‘경력신정慶曆新政’을 행했다. 신종神宗은 ‘희풍신법熙?新法’을 실시했고 철종 또한 ‘원우경화元祐更化’를 단행했는데 모두 중대한 정치적 조치였다. 이러한 정치 변동을 둘러싸고 조야 상하 간 의론이 분분했으며 심지어 때로는 커다란 풍파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정치사상 영역을 활기차게 만들었으며 정치 사조가 잇달아 출현하면서 여러 학파를 탄생시켰다.



    송대 리학의 정치 철학, 정치 가치, 정책 사상



    리학理學은 북송에서 흥기하여 남송에서 성숙되었다. 사실상 리학은 남송 말기에 이미 통치 사상의 지위를 획득했다. 원 왕조로부터 청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리학은 줄곧 봉건 왕조에 의해 관학官學으로 받들어지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600~700년 동안이나 주도권을 장악했다. 리학은 봉건 통치 계급의 권위주의적 정치 이론의 바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의 법정 표준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리학은 송대 이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정치적 사유 방식이며 전통문화의 대표자였다. 리학은 결국 유학 스스로가 내적으로 쌓아온 논리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고 승화된 결과다. 위진 이래 유학은 본체, 규율, 방법, 인성 등 철학 문제 및 그것과 도덕,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차츰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갖춘 이론 체계를 구성해왔다. 리학은 이러한 사상의 변화, 발전 과정의 완성이고 총결산이다.



    남송의 사공事功 사상과 등목鄧牧의 이단 사상



    남송에서 리학 사조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응한 것은 진량陳亮과 섭적葉適으로 대표되는 사공事功 즉 업적주의 사조다. 진량과 섭적 정치사상의 뚜렷한 특징은 실제를 지향하고 실천을 중시하며 사공을 제창하고, 심성을 둘러싼 공리공담에 반대하고, 농업과 상업의 상호 이익을 주장한 점이다. 그들은 강산을 가리키며 금金나라에 항거할 것을 애써 주장했다. 시대 정치를 평론하고 개혁을 창도했으며 사회 현실에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리학 사조에 대한 그들의 비평과 비난은 당시 사상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송말원초 사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졌으며 수많은 선비는 산림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폭정을 폭로하며 이단 사상의 발전을 촉진했다. 등목鄧牧의 정치 이상은 일부 선비들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데, 격렬한 사회비판 사상으로 일정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요遼, 서하西夏, 금金의 통치 사상



    당 왕조의 멸망에서 원 왕조의 수립까지 300여 년 사이에 요遼(거란契丹), 서하西夏, 금金나라가 북부(동북과 서북을 포함한) 중국에서 앞뒤로 흥기했다. 그들은 피차간 대치하기도 하고 중원의 왕조와 대항하고 경쟁하기도 했던 독립 왕조들이다. 그 가운데 요나라와 금나라는 연이어 북방에 웅거하면서 광활한 강역을 지배하고 극성기를 누렸던 대제국이었다. 요, 서하, 금은 정치 문화의 변천 측면에서 어느 정도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나하나의 마상馬上 민족이 한漢 민족을 통치하는 과정에 점진적으로 중화의 예법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이 그렇다. 그들은 문명의 큰길을 향해 치달았다. 왕권이 부단히 강화되어감에 따라 요, 서하, 금 내부의 군신 간 구별도 날로 삼엄해졌다. 군주와 신하가 상대적으로 권력을 나눠 가졌으며, 서로를 제약했던 구체제의 요인들은 이로 인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왕권은 또한 부패의 길을 향해 치닫기도 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마상 민족이 굴기하여 앞의 것을 대신하고 (…) 역사는 반복하여 비슷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보여주었다. 여러 원인으로 요, 서하, 금의 통치자들은 체계적인 정치 논저를 남기지 않았다. 이론화한 정치사상 체계는 더더욱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치국 방략, 정책과 언행을 보면 일부 뛰어난 군주들은 정치 문제에 아주 깊이 있는 사고를 표명하기도 했다.



    원元대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리학의 관학화



    원 왕조는 몽고 귀족이 한족 통치 계급과 연합하여 건립한 봉건 왕조다. 북송과 남송 이래 북방 소수 민족이 연이어 흥기했다. 하夏, 요遼, 금金 왕조를 건립했던 당항, 거란, 여진족 등과 비교할 때 몽고족의 흥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세력은 가장 왕성했다. 남송 개희開禧 2년(1206) 성길사한成吉思汗(칭기즈칸)이 대몽고국大蒙古國을 건립하고 막북漠北을 통일하고는 신속히 외부로 확장했다. 남송 단평端平 원년(1234)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적극적으로 송나라를 도모했다. 남송 도종度宗 함순咸淳 7년(1271) 세조世祖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이 원元 왕조를 건립하고 얼마 안 있어 남송은 멸망했다. 송원 교체기 화하華夏 전통의 유가 문화는 전대미문의 맹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북방 유목 문화와 고도로 발달한 중원 예악禮樂 문명은 격렬한 충돌, 대항을 거치면서 점차 조화와 융합의 과정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원대 정치사상의 발전에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게 되었다.



    명대 통치자들의 전제집권 강화 정치사상



    명明 태조太祖, 명 성조成祖, 장거정張居正을 대표로 하는 명대 통치자들은 중앙 집권과 전제를 강화하고 관리에 대한 통제와 안민安民을 동시에 주목하는 치국 방침을 받들었으며, 제왕의 권력을 한층 더 절대화했다. 절대 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중앙 집권 체제의 완성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정치 이론의 건설 또한 중시하여 일련의 치국 사상을 마련했는데, 이는 명대 정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절대 군권을 옹호하는 이 정치 이론이 군권君權을 조정하려는 전략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구준丘濬의 ‘제왕학帝王學’은 군권을 위한 활동 범위를 명확히 획정했으며, 최고 통치자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이는 명대의 통치 사상과 정치 사조를 이해하는 데 전형적인 재료를 제공해준다.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및 그 후학들의 정치사상



    원대 이래 정주학이 일세를 풍미했다. 그 철학, 정치론, 도덕관념이 인심에 깊이 파고들면서 거의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명대 중엽에 이르러 이 국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학술계에 정주학을 비판하는 사조가 출현했다. 심학의 굴기는 일시에 폭넓은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도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왕양명은 위로 공맹을 계승하고 “주희와 육구연을 범위로 하여 나아가거나 물러섬으로써”1 심학心學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그는 송·명 리학 가운데 정인심正人心 사상 및 그와 관련된 철학적 사변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정주학의 폐단을 교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정程·주朱와 육陸·왕王의 기본적인 정치 가치관은 다르지 않지만 심과 리를 결합시킨 왕양명의 철학적 사변은 심의 본체성 및 그 윤리도덕적 속성을 강화시켰다. 격민심지비格民心之非, 즉 민심의 잘못을 바로잡고, 파심중지적破心中之敵, 즉 마음속의 적을 깨뜨리라는 말은 심학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이론 문제다. 왕양명과 그의 후학들은 이 사유의 길을 따라 서민을 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구세의 방안을 탐색했으며 이로써 유학은 더욱더 세속화하게 되었다.



    동림당인東林黨人의 시폐 관심 정치사상과 충군忠君의 정치 심리



    명 왕조 중기 이후 국세의 점진적 쇠퇴는 주로 정치 혼란과 이치吏治 부패로 드러났으며 사회 갈등은 심화되었다. 만력萬曆 초기 장거정張居正이 재상을 맡던 시기엔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일조편一條鞭 세법을 시행하며 개혁에 힘씀으로써 퇴세가 늦춰지기는 했다. 그러나 오래되고 깊은 적폐 때문에 그의 조치들은 겉만 다스렸을 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없었다. 장거정은 권력을 쥐고 국정을 담당하면서 독단을 하고 친신만을 임용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언론을 억눌렀다. 이로써 통치 집단 내부의 권력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장거정이 병사한 후 권력 충돌은 아주 빠르게 격렬한 붕당 투쟁으로 바뀌었다. “당론黨論의 흥기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말엔 당쟁이 흥기했을 뿐만 아니라 발생할수록 수습이 불가능했다. “정사를 논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집정자를 심하게 재단하고 집정자는 날마다 그들과 맞서며 물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서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명 말 붕당의 이름은 절당浙黨, 제당齊黨, 초당楚黨, 곤당崑黨, 선당宣黨 등 아주 많았다. 동림당東林黨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쟁국본爭國本’ ‘이궁移宮’ ‘정격안?擊案’ ‘홍환안紅丸案’ ‘과장안科場案’ ‘북왕지국福王之國’ 및 계리計吏, 경찰京察4 등 정치 문제를 둘러싸고 공공연히 암투를 벌이고 쟁송을 그치지 않았다. 다른 붕당 집단과 비교할 때 동림당이 가장 특색이 있었다. 그들의 정치 주장은 시대의 폐단과 깊이 관련이 있어서 특정 사회 계층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을 얻었으며 명대 정치사상 발전상 특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청 초 봉건 사대부 집단의 자아비판 사조



    명청 교체기 인재와 천재가 무참히 이어지면서 사회 모순은 전례 없이 격화되었다. 명나라 조정 내부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부패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북방에선 만주족滿洲族이 발흥하여 대청大淸 정권을 수립하고 누차 명나라 군대를 패퇴시키며 중원을 압박했다. 하층 민중은 방법이 없이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사내가 장대를 높이 쳐드니 천하가 그에 호응했다.”1 복잡하게 뒤얽힌 사회 모순들이 한꺼번에 터짐으로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게” 되었으며, 국왕의 기강은 해체되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봉기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崇禎帝는 매산煤山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머지않아 청군이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중원을 쟁탈하니 대순大順, 대서大西, 남명南明이 연이어 패망했다. 중국역사상 최후의 왕조인 대청제국이 천하통일을 실현했다.

    극렬한 사회 혼란과 나라와 군주를 잃은 정치 대변동은 수많은 사대부로 하여금 명대의 정치적 병폐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송명 리학을 반추하게 했으며, 전통 정치사상과 정치 체제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했다. 비판과 성찰의 기초 위에서 그들은 도를 밝혀 세상을 구제하고, 실용을 숭상하고, 군권을 조정하고,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분분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정치 사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여유량呂留良, 당견唐甄 등을 꼽는다.



    청淸대 전기 제왕들의 정치사상: 절대 군권의 수호



    1644년 청나라 군대가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전국을 통치한 중국 역사상 최후의 봉건 왕조가 그 서막을 열었다. 청조의 최고 통치 계층은 만주족 귀족이 핵심이었는데 입관入關 전과 입관 후 상당 기간 동안 문화적 소양이 비교적 낮았다. 청조 원래의 정치권력 체제는 내지에 대한 통치에 적응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했다. 청나라 초의 순치順治,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네 황제는 정치적으로 아주 열심히 정무에 종사했으며 정치사상적으로도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탐구했다. 청조 황제의 정치사상에 대한 분석은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청 정은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총결하며 정치권력 체제상 군주 일인 전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동시에 청조 황제들 또한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견해를 제기했다. 가장 잘 드러난 점은 군주 전제 사상을 한 단계 절대화한 것이다.



    공자진?自珍과 고전 정치 사유의 종결



    청대는 중국 역사상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시기다. 일찍이 청 왕조가 건립되기 전 중국의 봉건사회는 이미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강건 성세康乾盛世’를 지난 뒤 대청제국은 극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9세기 전기에 이르러 봉건 제도의 문란과 청 왕조의 쇠락이라는 이중의 말세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전체 사회에서 경제 쇠퇴, 정치 부패, 사상 침체, 민생 곤궁이라는 황폐한 현상이 노정되었다. 각종 사회 모순이 매우 첨예하게 드러났으며, 농민과 각 소수 민족은 청 왕조의 통치에 반항하여 맹렬한 기세로 봉기를 일으켰다. 가경嘉慶 18년(1813) 천리교天理敎가 봉기를 일으키니 민중이 청조의 궁궐에 난입하여 융종문隆宗門에 활을 쏨으로써 청 조정을 크게 놀라게 했다. 가경제는 슬피 탄식했다. “한, 당, 송, 명에 없었던 일이 끝내 대청 조정에서 일어났구나.”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각국이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 해외 약탈을 전개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도 염탐과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었다. 중국의 대문을 열기 위해 영국은 외교 방법을 통해 교섭하는 동시에 무력 침략을 적극적으로 획책했다. 불법적인 아편 무역은 중국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사회 제도의 위기, 청 왕조의 위기, 그리고 중화 민족의 위기가 모두 무르익어 전면적 폭발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국 사회는 이미 “산비가 내리려니 온 누각에 바람이 가득했다”.

    세도世道의 쇠패와 사회의 동요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시선을 현실로 끌어왔다. 날로 격화되어가는 사회 모순은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불러왔다. 통치 계급 또한 세상을 구제하고 운세를 만회할 방법을 화급히 구하여 현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사상적 무기를 만들려고 했다. 세도의 변화를 가장 먼저 민감하게 느낀 사람은 사대부 계층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직접적으로 사상계 풍토의 변화를 유발시켰으며 차츰 하나의 사회 사조로 자리를 잡아갔다. 공자진?自珍은 이 사조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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