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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중국정치사상사 2

중국정치사상사 2
  • 저자류쩌화
  • 출판사글항아리
  • 출판년2019-05-23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2-03)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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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황秦始皇의 제왕전제 사상



    진시황은 바람 부는 대로 풀대가 쓰러지듯 무력으로 산동의 여섯 나라를 소멸시켰으며, 남으로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으로 흉노匈奴를 억눌러 공전의 통일 봉건 제국을 건립했다. 그런데 아스라이 높고 광대하여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던 진秦 제국은 불과 15년을 생존했을 뿐 민중 반항의 불꽃 아래 사라져버렸다. 진 왕조의 대대적 흥기와 대대적 몰락은 후인들에게 끝없는 사유의 과제를 남겼다. 진시황은 법가 사상의 지도 아래 승리를 얻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의 멸망 또한 법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후대 유가들은 대부분 이 견해를 고수하는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진시황은 처음 사상 문화적으로 법가를 위주로 하되 다른 학파의 사상학설을 두루 병용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따라서 음양가, 유가, 도가, 종교 신학 모두 일정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진시황도 처음에는 유가를 배척하지 않았다. 박사관은 주로 유생들로 충당했다. 유생박사들은 의정議政에 참여했다. 여러 사상의 병존은 진 제국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진시황의 극단적인 전제권력 욕망과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분서焚書는 사상의 자유에 타격을 주기 위함이다. 당시 각종 유파, 특히 유가는 진시황의 정치 행위에 사사건건 쉬지 않고 흠집을 들춰내고 있었다. 진시황이 태워버린 것은 단순히 책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지식이었으며, 사람들의 사유의 자유였다. 분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이듬해에 이를 핑계로 갱유坑儒를 단행했다.

    진 왕조는 이론적 사유를 질식시켜버린 시대다. 이론적 사유에 대한 멸시는 곧 야만의 횡행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진 왕조 전체 관료 체계의 야만화는 왕조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진 왕조의 빠른 멸망은 법가가 초래한 악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군주 전제 제도에 대한 법가의 설계와 이론이 진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포기되지는 않았다. 한漢나라는 진나라 제도의 실질을 계승했다. 이는 법가의 정치 이론이 실질적으로 여전히 효과가 있었음을 설명해준다.





    한 초 사상가들의 한 제국 정치에 대한 설계



    한초 정치사상은 대체로 한편으론 통치자들이 황로黃老 사상을 분명하게 제창하면서 유가의 가르침으로 보조를 삼고 암암리에 법가를 응용하는 짜임새였다. 다른 한편으론 도가, 유가, 법가가 서로의 잘못을 들춰내어 공격하고 투쟁했다.

    육가陸賈는 12편의 상주문을 묶은 『신어新語』를 지어 유방 및 한초의 통치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반고班固는 육가의 『신어』, 소하蕭何의 ‘율령律令’, 한신韓信의 ‘군법軍法’, 장창張蒼의 ‘장정章程’, 숙손통叔孫通의 ‘예의禮儀’를 한나라 천하를 결정지은 5대 지주로 열거했다. 이중 넷은 주로 제도적 결정을 논한 것이고 『신어』만 정치사상을 논하고 있다. 사상의 영역에서 『신어』가 한대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이로써 알 수 있다. 육가는 인류 역사와 물질문화가 모순 속에서 진보하며, 형벌과 예의도 모순 가운데 생겨나고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육가는 옛날을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관점을 비판했다. 이런 관점은 “보이는 바에 담담하고 들은 바에 달가워하며, 겉모습에 현혹되어 중정中情을 잃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치 관념으로 볼 때 육가에게는 인의와 무위가 기본적으로 서로 중첩되어 있다. 육가의 무위론은 확실히 도가적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사회적 관계와 사회 관념은 도가와 또 상당히 거리가 멀다. 대체로 존귀한 자를 존중하고 가까운 사람과 친하며, 신하는 충성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상하에 차례가 있으며, 늙은이는 편안하고 어린애는 보살펴지며, 예의를 준수하는 등 유가가 설계한 기묘한 경지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무위는 또 다른 형식의 유위다. 육가는 유학, 특히 순자의 학을 제창했다. 그리고 도가와 법가를 종합하여 두루 취했으며 역사를 통찰하여 현실에 맞대면했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공허하지 않았다. 저자는 “자신은 계속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동했지만, 논의는 오히려 대범하고 개방적이었다. 개성이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하는 말이 적으니 참으로 대단하다”면서 육가를 높이 평가한다.



    한漢제국의 정치 대일통과 독존유술獨尊儒術



    한漢 제국은 몇십 년의 발전을 거쳐 중앙 집권적 군주 전제 정치 체제를 날로 공고히 했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인식 수준에선 오히려 이런 체제에 맞지 않는, 예컨대 도가의 황로黃老 무위 사상 등과 같은 현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하의 통치자에게 있어 정치적 실천은 그에 상응하는 이론 지침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제국의 정치 체제에 맞는 이상적 정치 양식을 찾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한대 유학자들이 제창한 ‘대일통大一統’ 사상은 그렇게 제왕들의 마음에 와닿았으며,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와 한漢 무제武帝의 인가를 거쳐 유학은 마침내 일존一尊으로 정해졌다. 이는 한대 정치사상 발전 과정상 일대 사건인 동시에 중국 고대 정치사상과 문화 발전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로써 유가 사상은 차츰 상승하여 중국 전통 사상 문화의 주체가 되었으며, 그 영향력과 의의는 지극히 심원한 것이었다. 한대 정치사상의 발전으로만 본다면 존유尊儒는 한 초엽 이래 유가들의 신흥 제국에 대한 정치설계가 궤도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그 후 일부 쟁론과 반박이 있었으며 ‘한 왕실 제도’의 정수가 순수한 유학이 아니라 ‘패도覇道와 왕도王道가 뒤섞인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유학이 제국의 정치적 지도 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한漢 원제元帝의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마침내 유학은 정치사상 영역에서 주도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공양전』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의 정치사상을 다룬다. 정치사상의 각도에서 볼 때 『공양전』의 이론 구조는 명료하다. 왕권 ‘대일통’이야말로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이론의 기본선이다. 등급 원칙, 군신 관계, 군통 승계 및 화이 구별은 이 기본선이 각기 다른 측면을 향해 깊어지고 발전한 것인데, 이론상으로 국가형식, 통치 계급의 권력 점유와 분배 및 민족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다. 전문 저자의 기본 사유는 시종 단일 권력이 주재하는 일통천하를 어떻게 건립하고 공고히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있다. 이에 근거하면 왜 『공양전』의 운명이 그 자매편인 『곡량전』과 『좌전』보다 우월할 수 있었는지, 전한에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한 무제가 유학을 숭상하고 오경박사를 둔 이래 『공양전』은 가장 먼저 정치적 신분을 취득한 유가 경전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학파도 외롭지는 않아서 효제孝帝, 선제宣帝 시대에는 ‘곡량의 『춘추』’를 세웠고, 평제平帝 때에는 “다시 좌씨의 『춘추』를 세웠으나,” 정치적 영향과 실제 정치 지위로 볼 때 『곡량전』과 『좌전』이 『공양전』과 필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양전』의 ‘대일통’ 정치사상 체계에 있다.

    한대 공양학파의 진일보한 탐구와 일정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일통’ 사상은 점차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아갔다. 기나긴 중국 고대사회에서 『공양전』의 기본 이론은 각양각색의 학설 또는 사조와 서로 융합하면서 시종 군권의 일통천하를 옹호하는 데 사상적으로 주도적인 작용을 했다.



    유가 정치 관념의 경전화와 사회의식화



    한 무제의 유가 학술만을 존중하고獨尊儒術 시험을 치러 선비를 선발開科取士하는 제도는 사인士人 대다수가 유가 서적을 읽고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이끈 동시에 유가 학술을 정치의 한 구성 요소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매우 분명한 두 가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청淸나라 사람 방포方苞의 말대로 “유가의 앞길은 확 트였지만 그 도는 망했다”1는 것이다. 방포의 말은 지나친 절대화이긴 하지만 대체로 수긍이 간다. 대다수 유생이 유학을 ‘도’로 추구하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문고리로 여기게 되었고, 유가 학술은 독존적 지위에 놓인 동시에 금고禁錮를 당해 학술 문화적 독립성과 초월성을 잃게 되었다. 둘째, 유술이 사회와 인간을 규제하는 이론적 원칙이 되었다. 이 원칙은 지고, 지성至聖한 것으로 사회 모든 분야 위에 드높이 걸렸다. 사회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은 일거에 유가 경전과 원칙의 부산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론이 실천보다 높고, 원칙이 생활보다 높은 유가 교조주의가 전 사회에 가득 차게 되었다. 유학적 사유 방식의 형성이야말로 중화 민족의 최대 재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경전을 존중하여 경전을 읽고, 성인을 대신하여 주장을 세워 수많은 사람을 ‘경經’으로 먹고사는 벌레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생기는 것 또한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경학내에 다양화, 다원화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처음 독존유술을 실행한 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사상 다원화 규율의 변형된 표현이라고 해야겠다.



    군권君權 합법성 이론과 군권 조절론



    한漢대 정치사상의 기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 이론의 실제 정치적 가치와 효력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제국에 유리하기만 하면 어떤 학설이든 통치자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론이 정치를 위해 봉사했으며 사상가들은 제왕을 위한 난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한대 제왕은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론적으로 군권의 지상성과 신성성을 강화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치 조절 능력을 군권에 부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대 정치사상 영역에서는 두 가지 이론 사조가 함께 짜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으로 사상가와 정치가들은 천天, 성聖, 도道 등 정신적 권위를 이용하여 군권의 합법성을 위해 논증했다. 천, 성, 도 등 여러 신성한 명예를 왕관 위에 덧씌웠으며 군권을 인식론적으로 다양한 권위의 집합체로 만들어 전체 사회의 군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높이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또한 천, 성, 도의 권위를 이용해 군권을 제약하려 들었는데, 일반 정치 원

    칙과 이론상의 허구적 권위를 운용해 군주가 정치적으로 정상적인 행위를 하도록 보장하고자 했다. 이 이론 현상의 표층을 보면 천, 성, 도, 왕이 통일되기도 하고 서로 어긋나기도 했으나, 심층 의미에서 보면 정반 두 방면에서 군주 정치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논증해주었으며, 군권의 절대성을 강화하고 한 왕실 천하의 영원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심후하고도 굳건한 이론 기초를 만들어주었다.



    전한 후기 정치 조정 사조와 왕망王莽의 복고개제復古改制 사상



    전한 제국은 100여 년간 발전하다가 원제元帝, 성제成帝, 애제哀帝, 평제平帝 대에 이르러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는다. 첨예한 빈부 대립과 통치 집단 내부의 권력 분쟁이 얽히면서 식자층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한漢 왕실을 구원해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으로 모순에 가득 찬 사회와 정치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으며, 통치자 내부 및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일련의 정치적 조정이 필요함을 제기함으로써 막다른 길목에 들어선 제국의 구원을 구상했다. 융성했던 제국이 몰락해감에 따라 통치자들의 권력의식은 ‘영명永命’의 추구로부터 ‘갱명更命’에 희망을 거는 쪽의 발전 과정을 거친다. 갱명 사조는 비폭력적인 권력의 경질을 인정하여, 헤어날 길이 없음에도 창칼을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은 전한 통치자들에게 한 가닥 살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사조를 등에 업고 왕망王莽은 기회를 틈타 한 왕실을 대신한 신新 왕조를 세웠다. 왕망은 여론 조작과 권력 획득 음모에 대단히 능했으나 제도 개혁을 통한 치국 방면엔 몹시도 평범했다. 서주西周의 정치 양식을 재현하겠다는 믿음이야말로 개중 나은 정치적 선택이었다. 일방적 소망이었던 이 복고적 이상주의는 신 왕실의 단명을 예정한 것이었다.



    후한 전기 참위화讖緯化한 경학 정치관과 회의론



    경학의 참위화는 후한 전기 정치사상의 주류였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천하에 도참圖讖을 선포함”으로부터 신비주의적 참위경설讖緯經說은 정식으로 관방의 인정을 받아 갈수록 광범하게 유행했다. 참위학은 전한前漢이래의 음양오행, 천인감응, 천인합일 사유 방법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형식이다. 그 핵심은 왕권 신격화에 있었다. 신, 자연, 인간의 일체화를 통해 논리는 황당하나 주장은 분명한 정치 신화를 엮어냈다. 이런 상황 아래 참위학과 금고문今古文경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황제의 어전에서 결정이 남으로써 참위가 나중에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더니 거의 경학 정통의 위치를 점했다. 황당무계한 날조된 정치 신화가 정치권력의 인정을 거쳐 진리로 바뀐 것이다. 천지신명과 성인귀신에 대한 사람들의 숭배와 미신이 온 세상을 뒤덮고 후한 사회 전체를 풍미하던 바로 그 무렵 왕충王充이 당당히 걸어 나와 심대한 일격을 가했다. 그는 후한 말의 정치적 성찰과 위진魏晉 현학玄學의 발흥을 위한 회의론과 비판론의 선구가 되었다.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에서 『논형』의 지위와 작용은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이단적 사조에 대한 영향이고, 둘째는 통치사상에 대한 영향이다. 『논형』은 경직되고 폐쇄적이고 썩어빠진 경학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으며, 천인감응, 참위부서 및 각종 미신 숭배에 대한 폭로와 비판을 행했다. 그리하여 가라앉아 있던 사상계에 신선하고 강한 바람을 불어넣어줌으로써 경학을 떠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왕충이 후한의 관방철학을 비판했고, 이성을 가지고 신학을 청소하려고 시도했지만 역시 통치 사상의 기본 방향을 건드린 적은 없다. 역사 발전의 시각에서 볼 때 천도자연론은 천인감응론을 약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양한 경학으로부터 송명 리학으로 통치 사상의 이론 형태가 발전해간 기본적인 추세였다. 왕충은 바로 이러한 이론 형태 조정의 선구자였다. 한 명의 사상가로서 왕충은 감히 공개적으로 황제가 정한 사상에 도전했으며, 신성불가침한 봉건 시대의 각종 권위를 감히 비난했다. 그 자체로 왕충은 대단히 중요한 인식론적 가치가 있으며 정치적 의의가 있다.



    후한 후기의 명교名敎와 정치 반성 사조



    후한의 통치자들은 전한의 효치孝治 전통을 계승하여 강상명교綱常名敎를 극력 제창, 선양했다. 공자를 존중하고 ‘효제염정孝悌廉正’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이끌어감으로써 유가의 전통적 예법 제도와 윤상도덕에 전체 사회가 찬동하도록 조종했다. 이를 기화로 후한 왕조의 정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교를 중시한 결과, 선비들이 미명이나 최고의 명예를 얻기 위하여 “부화교회浮華交會” 즉 겉치레를 하고 화려하게 수식하며 당을 지어 교제하는 행위를 하고, 서로를 표방함으로써 이름과 실질이 자주 어긋나 후한 후기 명교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 위기는 환관, 외척, 사대부 등 이익 집단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권력 투쟁과 맞물려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를 걱정하며 사대부 집단은 서로를 “품평하고, 공경대신들을 논평하고, 정치를 재단했으며,” ‘청의淸議’라는 여론으로 정치에 간여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와 희망 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왕부王符, 중장통仲長通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시대적 폐단에 깊이 있는 반성과 비판을 가했다. 그들은 조정의 기강을 다시 바로잡고자 여러 설계를 했지만 결국 뒤집힐 후한의 운명은 막아볼 방법은 없었다.



    초기 도교와 『태평경太平經』의 정치사상



    도교는 중국 땅에서 생기고 자란 종교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더불어 전통문화 체계 내에 삼각 정립의 형세를 이루며 봉건 통치자들의 중요한 통치 도구가 되었고 사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교는 후한 후기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서 유행하다가 차츰 교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도교엔 양대 교파가 있었다. 하나는 동부 지역에서 장각張角에 의해 창립된 태평도太平道이고, 다른 하나는 파촉巴蜀 지역에서 장릉張陵에 의해 창립된 오두미도五斗米道다. 양대 교파에는 모두 자신들이 받드는 경전이 따로 있었다. 태평도는 『태평경』을 경전으로 삼았고, 오두미도는 『노자』를 경전으로 삼았으며 『노자』를 해설하고 주석하는 과정에서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라는 책이 만들어져 오두미도의 비전이 되었다. 이 시기엔 또 양기養氣, 연단煉丹을 내용으로 하는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가 출현하기도 했다. 『태평경』 『노자상이주』 『주역참동계』는 초기 도교 경전의 대표작들이다. 초기 도교의 기본 이론과 내용은 매우 잡박하다. 선진 이래의 각종 사상적 성분을 뒤섞어 비교적 조잡한 종교적 신학 사상 체계를 형성했다.

    여러 현학자의 명교-자연 관계에 대한 견해는 서로 큰 차이가 난다. 명교와 자연과의 통일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정통 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유학에 대한 수정이자 배반이었다. 현학은 시작하자마자 정통 유학의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걸, 주다도 죄가 큰 천고의 죄인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현학이 사상적 혼란을 조정하여 공자 학설을 침몰시키고 있으니 죽여 없애도 그 죄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안何晏은 하안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위魏 명제明帝 때 ‘부화교회浮華交會’ 즉 화려한 겉치레 교류 회합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하후현夏侯玄, 순찬荀粲, 등양鄧?, 부하傅?, 이풍李?, 왕광王廣 등과 나이가 훨씬 더 어렸던 왕필, 종회鍾會 등이 있었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추구했다. 각자의 견해는 달랐으나 전체적인 경향으로 볼 때 대체로 한나라 유학의 속박을 깨뜨리거나 유학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사유를 전개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노자를 찬양

    했다.

    곽상은 위진 현학의 집대성자다. 그의 『장자주』(이하 인용문은 편명만 명기함)는 오랫동안 장자 주석의 권위를 인정받았으며, 그의 ‘내성외왕’의 도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토론 주제이자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으니 그 영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한 말 위진 시대 명법名法, 명리名理 사조와 현학玄學의 정치사상



    양한의 통치자들은 유가의 강상명교綱常名敎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나 한말 명교의 쇠락은 한대 경학을 담체로 삼았던 효치孝治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상적 혼란과 정치적 동요가 서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 아래 정치사상 영역에선 두 가지의 강력한 사조가 출현했다. 하나는 명실名實 논쟁과 재성才性 논변이 하나로 융합된 명법名法 사조였다. 한말의 사상가 및 정치가들은 법제, 형명의 학문을 다시 주워들고 분열과 전란의 와중에 강제로 통치 질서를 회복코자 했으며 국부적인 정치 안정을 실현하기도 했다. 또 하나는 명교와 자연 관계 분석을 주된 사유방법으로 하는 현학玄學 사조였다. 현학자들은 도교를 유가에 끌어들였는데, 입으로는 오묘하고 요원한 이야기들을 했으나 실제론 정치 철학의 위치에서 명교의 합리성에 대한 재인식을 진행했다. 그 가운데 완적阮籍, 혜강?康을 우두머리로 하는 죽림竹林 명사들은 정치에 대한 전통적 인식의 웅덩이를 뛰어넘어 진부한 양한의 경학적 사유에 ‘괴이하고 허망한怪誕’ 청신한 바람을 주입했으나 끝내는 압살당했다. 현학은 끝내 진晉 대의 통치자들에게 명교의 합리성을 논증해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학의 정치사상과 양한의 정치사상은 크게 다른데 주로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첫째, 현학은 전통 정치 철학이 소홀히 다룬 문제, 즉 정치사상의 합리적 기초와 원칙들을 논의하는 데 치중했다. 양한과 달리 현학은 구체적인 문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관직을 설치하고 구분할 것인지, 어떻게 관리를 관찰하고 임용할 것인지, 어떻게 인사 고과와 공적 평가를 할 것인지 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명한 이치로 여겼던 일련의 개념들, 예컨대 성인, 도, 명교와 도의 관계, 인위와 자연 등의 토론에 치중한다. 둘째, 구체적인 정치 문제에 대한 관점을 보면 위진 현학 또한 특수한 점들이 있다. 존군尊君 문제를 보자. 현학은 군주의 지위와 작용을 십분 존중한 듯이 보인다. 군주를 도에 비유하는가 하면, 인간 세계의 종극宗極, 유일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종극이 성립하는 이유를 ‘정靜’ ‘무위’ 등의 특징을 갖춘 사람으로서의 군주를 설명하는 이론에서 가져오고 있다. 이는 오히려 현실 정치에서 군주의 작용을 낮추어 보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 시기엔 무위 정치를 강조했다. 거의 모든 현학자가 무위 정치의 실행을 주장한다. 군주는 정치의 실제 움직임에 적게 간섭하고, 관리는 업무 성과로 능력 여부의 표준을 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 또한 양한 시기와 크게 달랐다. 그건 확실히 이 시기 군권이 쇠락하고 명문거족이 흥기한 것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



    양진兩晉 남북조 시기 정치사상의 다원적 발전



    한말 삼국三國 이래 정치 분열 및 사회 동요는 한대 경학에 심대한 충격을 가했다. 정치사상 영역에서 유학 독존의 통일된 국면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유가, 현학, 불교, 도교 등 여러 학설이 상호 경쟁하며 병존하는 다원화 추세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문화의 다원적 발전이란 표상의 뒷면에 또 다른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진으로부터 남조의 송, 제, 양, 진에 이르기까지 한대 경학의 정치적 가치 주체와 몇몇 정치 원칙이 여전히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양한 정치사상의 발전과 심층적 차원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경향은 양한 주공周公, 공자의 도가 정치적 분열과 문화적 다원이라는 특수한 역사 조건하에서 여전히 자신을 유지하고 면면히 연속되어 수隋, 당唐 시대 유학의 진흥과 3교의 합일을 보장해주고 그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양진 및 남조 시기 유가 정치사상의 전승은 덕치, 인정, 절검, 화이론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핵심은 한대 유가의 둥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 유가 사상의 역사적 지위는 세상의 주목을 끈 현학이나 불교, 도교에 크게 못 미쳤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선양, 예제, 군신, 법제 등 문제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던 사람이 모두 통치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이거나 군주 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가 사상 및 그 정치 원칙들이 여전히 통치 계급들에 의해 치국평천하의 기본 방침이자 정책 근거로 받들어지고 있었다는 표시다. 바로 이 점에서 그것들이 한, 당 유가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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